필사

2024. 4. 3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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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트루니에는 썼다.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고. 십분 공감하며 이 글을 시작해 본다. 한 해가 끝나기 전, 마주하는 이 시간은 이미 나의 손을 떠나간 것처럼 보인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을 더이상 잡을 수도, 잡고 매달릴 수도 없다. 마음이 묘하게 붕뜬다. 설렘과 쓸쓸함이 혼재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역시 올해도 완성하지 못했다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는 아쉬움과 새해엔 달라질까 싶은 기대가 뒤섞여있기 때문에.

 

전혀 달라진 건 없지만 올해 유독 외운 문장이 있다.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하지'

이 말은 즉슨, 너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다는 말이다. 사랑 앞에 설 때마다 상대방은 너무 거대해지고 자신은 납작해지는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오로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이 말을 입에 올렸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랑의 주체는 나라고.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생각해 본다. 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마감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망할 일도,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병원비로 속이 상할 일도, 야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가을 축제에 소외감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특별하다'는 말을 다시 들여다본다. 특별하다는 건 보통과 구별되게 다른 것. 타인과 나 사이에 그어진 직선을 곡선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절망도, 속이 스린 일도, 소외감도, 전전긍긍하는 일도 사랑하기에, 특별하게 용인되는 것 아닌가. 보통의 사람, 보통의 일, 보통의 날만 있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지금보다는 조금 편안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물처럼 사용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보통일 텐데. 보통의 인간들만 대하는 나는 지금보다는 덜 괴롭고 덜 불행했을 것이다.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하지.

그럼에도 나는 이 문장을 다시 쓴다.

내가 좋아하는 네가 얼마나 특별한지.

 

카페에 앉아 그의 얼굴과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우리도 저렇게 지나갈 수 있었던 사이였을 텐데. 서로의 이름 하나 모른채로 백 년 가까이 살았을 텐데. 저 많은 사람들 중 그가 내 앞에 앉아있는 이유는, 그가 나에게 특별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너. 특별하기에 배울 수 있는 감정들을 본다. 더 괴롭고 더 불행했을지라도 나는 특별한 것들이 있어 실컷 동요했고 더없이 기뻤다.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할 줄 알고 우리에게 있는 다음을 선물처럼 느낄 줄 안다. 이 넓고도 거대한 우주에서, 내가 좋아하는 네가 얼마나 특별한지.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었던 우리를 우리라고 호명하는 일이 얼마나 근사한지. 시간 밖에서 고백해본다. 무감한 보통의 날보다 고통스럽고 특별한 날들이 좋았다. 실컷 사랑하겠다. 새해에도, 지금처럼.

 

출처 1riot_of_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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