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book and thoughts
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해 지우는 자신에게 겨우 '할일'을 줬다. 그중 하나가 연필 가루 위에 연필 가루를 얹는 일, 선 위에 또다른 선을 보태는 일이었다. 가난이란...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정수리에 잎 그림자 몰아치는 날슬픔이 꼭 훌륭해야 할 필요 없잖아요 버려야 될 빗들 화병에 꽂아놓고새로운 방식의 꽃다발을 만들어요털 가닥이 쏟아지는 구름무너지는 겨울 장마의 한편을 헝클어뜨릴 계획이니까요단정해지는 건 싫어요당신의 말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졌던 길예측할 수 있는 모든 가르마에 대해차라리 밀어버리자고요 적당히 우스워지며 실패를 사로잡는 법나무빗의 손잡이를 잡을 때아직도 난 빗을 숲이라 믿는 사람화장대에 놓인 숲을 머릿속에 들이미는 사람딱딱하고 무심한 덩어리, 빗질을 따라 흩어지는 벌레들이 빗을 망치 삼아 휘두른다면?당신의 뒤통수, 연약한 구멍의 어딘가를 후려친다면?코피를 질질 흘리며 저물녘 하늘에 가닿을 거예요피를 흘리는 일에게, 피를 흘리는 자로서 내일은 신년이니까어제도, 내일모레도, 그제..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눈물이 많은 일도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아득하다 나는 이제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좋기도 하였다
눈을 떴고 어두웠고 지금은 새벽이군, 어렴풋이 인식했고 당연한 일이라며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여전히 어두웠고 순간 나는 새벽이라는 시간을 무수히 지나쳐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새벽, 그렇게 있으면서 새벽에 깨어나면 눈뜬 채 가만히 누워 있기도 간혹 앉아보기도 했고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새벽은 매번 지나가고 있었고 또다른 새벽에는 물론 꿈속이었을 테고 어느 날 깨어날 때도 눈감은 채 잠을 청하거나 날 밝길 기다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면. 깨어난 새벽마다 어디든 나가보았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러므로 나는 새벽, 지금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느꼈네. 몽롱한 상태로 마침 이곳은 고향집이었으므로 더 가볼 수 있는 곳은 시내가 아니라 제(堤)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중 찰나의 포착도 기다림의 결실1) 무슨 일이든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정하기살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뿌리는 서서히 형성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2) 나는 되어가는 존재라고 믿는 것3) 결과가 아닌 과정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것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The journey is the reward.오직 돌아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속도에 맞춰 생각을 정리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과 가까이한다는 것은 책의 물성이 주는 편안함에 녹아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종이의 부드러움, 단정한 활자가 주는 안정감, 활자와 삽..
미셸 트루니에는 썼다.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고. 십분 공감하며 이 글을 시작해 본다. 한 해가 끝나기 전, 마주하는 이 시간은 이미 나의 손을 떠나간 것처럼 보인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을 더이상 잡을 수도, 잡고 매달릴 수도 없다. 마음이 묘하게 붕뜬다. 설렘과 쓸쓸함이 혼재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역시 올해도 완성하지 못했다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는 아쉬움과 새해엔 달라질까 싶은 기대가 뒤섞여있기 때문에. 전혀 달라진 건 없지만 올해 유독 외운 문장이 있다. '너도 내가 좋아할 때나 특별하지'이 말은 즉슨, 너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다는 말이다. 사랑 앞에 설 때마다 상대방은 너무 거대해지고 자신은 납작해지는 ..
저는 니체가 생각하는 운명과 우리 자신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인간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사랑의 투쟁'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투쟁하고,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킬 수 있습니다. 인생은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엄습하는 운명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지, 어떤 외모와 지능을 갖게 될지, 어떤 병에 걸릴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 것인지 등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인생은 이러한 운명과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우리는 좌절하면서 자신이 부딪힌 운명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비해 너무나 가혹했고 인생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고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니..
정현은 교묘하게 날 평가했다. 주로 좋은 말을 먼저 건네며 이전의 차림들을 깎아내리는 식이었는데, 당장 코앞에서 칭찬하는 이를 두고 화를 내기도 뭐 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전에 입었던 옷들을 다시 입어 보며 어느 부분이 어떻게 별로였는지, 나의 몸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했다. 그러다 보면 이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던 옷이 나의 단점만 부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옷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수납함에는 안 입는 옷들이 늘어났고, 새로 사는 옷들은 하나같이 정현이 칭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늘 목의 이물감에 시달렸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잊고 있다가 침을 삼킬 때면 한두 번씩 따끔 하는 정도였다. 너무 사소해서 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