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2025. 1. 14. 15:07
728x90

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해 지우는 자신에게 겨우 '할일'을 줬다. 그중 하나가 연필 가루 위에 연필 가루를 얹는 일, 선 위에 또다른 선을 보태는 일이었다. 

 

가난이란...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미술은 자기 정화 효과가 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주지만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재능은 있되 그게 압도적인 재능은 아님을 깨달아서였다. 사실 그걸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당장 학원 친구들의 그림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리는 궁금했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재능은 얼마만큼인지. 그 힘은 언제까지 필요하고 어떻게 이어지는지. 

 

지우가 돌아오는 날 소리는 지우에게 용식과 함께 그 달력을 건넬 계획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소리는 그저 그 자리에 자신이 채권자로 앉아 있지 않기를 바랐다. 지우 또한 채무자가 아닌 친구로 거기 있어줬으면 했다. 소리 생각에 그러려면 둘 사이에 어떤 형식 혹은 교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사람 사이의 어떤 계산 혹은 지위를 무화시키는.

 

중요한 건 여러 번의 계절을 나는 동안 지우가 용식을 깊이 봐온 것만큼 용식 또한 지우를 계속 지켜봤음을 지우에게 알려주는 거였다.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감수하는 게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 착각했어. 네 아빠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인생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곁에 있는 이들을 우리는 아첨꾼이라 부르지 가족이나 친구라고는 안 하잖아? 희생과 인내가 꼭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닌데, 그때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두려움을 못 본 척했던 것 같아. 진실은 감당하는 데는 언제나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네게 이런 이야기까지 털어놓다니 부끄럽구나. 하지만 너도 곧 어른이지. 내 나이가 되면 어떤 건 이해하게 될 테고. 서두가 긴데 아무튼 그런 얘기야. 가까웠던 관계가 손상된 이야기. 발에 차이는 돌처럼 무개성하고, 쓰레기처럼 흔한 이야기. 젊은 시절 한때 마음을 흠뻑 줬던 사람을 떠나는 이야기. 혹은 떠나보내는 이야기.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채운아. 그게 설사 너와 같은 지옥에 있던 상대라 해도.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뿅뿅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하지만 지우는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728x90

'Life > book and though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윤제,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0) 2024.12.23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0) 2024.12.04
안태운, 오송  (8) 2024.10.17
20241014  (0) 2024.10.14
필사  (0) 2024.04.30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