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자, 저는 그것이 사람이었든 물고기였든 혹은 네시였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그가 저한테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저는 집에 가서 엄마를 돌보며 필사적으로 돈을 벌고 재계약에 성공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에요. 다음에는 정말 이런 일이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겠지만, 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에요.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가끔은 곤이 무면허 운전으로 사 갖고 오기도 했으나 그걸 먼져 펴보는 일은 없었다.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예측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곤, 그에게 있어서 당신은 어쩌면 일찍이 들어본 적 없던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직조된 존재였어요. 그건 강하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당신에 대한 강하의 ... 글쎄요, 그 불합리는 과연 뭐였을까요, 그 긴장과 불안과 원망은. 강하는 그 혼란을 평범한 일상이 주는 초조 정도 차원으로 수용하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당신에게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라는 사실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괴리감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곤, 보통 사람은 말이지요, 자신에게 결여된 부분을 남이 갖고 있으면 그걸 꼭 빼앗고 싶을 만큼 부럽거나 절실하지 않아도 공연히 질투를 느낄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없다는 이유만으로 도리어 좋아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요. 양쪽의 세계에 걸쳐진 감정은 서로 교환되거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기껏해야 적정 수준에서의 은폐가 가능할 뿐이에요.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다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강하가 예전에 당신을 어떤 방식으로 싫어했든 간에, 그 싫음이 곧 증오를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걸.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라는 걸요.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 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가요. 강하와 할아버지만이, 그리고 막판에 이녕 씨만이 둘러싼 세상의 전부였던 당신에게, 이것은 선뜻 이해가 가는 말이 아닐 수도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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