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윤제,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2024. 12. 2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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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 잎 그림자 몰아치는 날
슬픔이 꼭 훌륭해야 할 필요 없잖아요
버려야 될 빗들 화병에 꽂아놓고
새로운 방식의 꽃다발을 만들어요
털 가닥이 쏟아지는 구름
무너지는 겨울 장마의 한편을 헝클어뜨릴 계획이니까요
단정해지는 건 싫어요
당신의 말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졌던 길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가르마에 대해
차라리 밀어버리자고요
적당히 우스워지며 실패를 사로잡는 법
나무빗의 손잡이를 잡을 때
아직도 난 빗을 숲이라 믿는 사람
화장대에 놓인 숲을 머릿속에 들이미는 사람
딱딱하고 무심한 덩어리, 빗질을 따라 흩어지는 벌레들
이 빗을 망치 삼아 휘두른다면?
당신의 뒤통수, 연약한 구멍의 어딘가를 후려친다면?
코피를 질질 흘리며 저물녘 하늘에 가닿을 거예요
피를 흘리는 일에게, 피를 흘리는 자로서
내일은 신년이니까
어제도, 내일모레도, 그제의 그제도 실은 전부 신년이니까
매일 버릴 수 있는 또다른 빗이 놓여 있고
그건 우리의 죽은 숲
새로운 띠의 동물이 매일 현관 앞에 죽어 있어요
꼬리가 지평선만큼 긴 흰쥐
벼랑을 입에 문 갈색 강아지가
매일이 선물이 아니라면 뭐지요?
그 선물이 반드시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요
우린 노을빛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
죽은 동물을 우리 밖에 풀어버리세요
새로운 띠를 간직하는 골목들
그래요,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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