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시대

2023. 10. 1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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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특정 다수를 본능적으로 조심하는 자다.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익명으로라도 말을 아낀다. 누군가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고 스스로가 수치스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은 기록으로 남지 않나. 기록된 글이 얼마나 세상을 떠돌며 이리저리 오해될지 복희는 두렵다. 작은 오해라 해도 말이다. 복희는 그런 것이 내키지 않는다. 댓글 따위 안 남겨도 상관없다. 

많은 사람이 복희처럼 인터넷을 사용한다면 세계가 지금보다 좋아질지도 모르겠다고 슬아는 생각한다. 자신도 복희처럼 보는 건 많고 쓰는 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집 바깥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뜩 보고 들은 뒤 집안사람들에게만 공유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식사를 마치고 웅이는 다시 일한다. 차리는 일만큼이나 치우는 것도 만만찮은 노동이다. 마당에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씻을 때가 됐다. 어느 집 앞에나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고 그 안은 쉽게 더러워진다. 그는 고무장갑을 끼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마당으로 나간다. 네모난 뚜껑을 열자 다소 역겨운 냄새가 난다. 시큼하고 짭쪼름한 냄새다. 수돗가로 들고 가서 고인 물을 버린다. 숨을 참으며 박박 세척한다. 통을 다 씻어낸 웅이가 집에 들어와서 중얼거린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에요." 한숨을 쉰 뒤 덧붙인다. "더러움을 참을 줄 알게 된다는 거예요." 

 

 

웅이가 공손하게 말한다. "원하시면 다음에 또 데려오셔도 돼요. 우리는 밖에서 자는 것도 좋거든요."누운 슬아가 대답한다. "어제 데려온 사람을 다시 데려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상대가 나타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해놓고 슬아는 설렘이 아닌 피로를 느낀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등 말고 정수리를 바닥에 굴린다. 굴리며 중얼거린다. "젊음은 괴로워......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거든."복희가 묻는다. "그게 행운이지, 왜 괴로워?"정수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답한다. " 다 해봐야 할 것 같잖아. 안 누리면 손해인 것 같잖아."복희는 다 해볼 수는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도 이미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이렇게만 말한다."인생에서 손해 같은 건 없어." 정말 그런가, 하고 슬아는 생각한다."누굴 얼마나 만나봐야 진짜 충분하다고 느낄까."복희는 그런 충분함 같은 건 영원히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의 앞날엔 아직도 무수한 데이트가 남아 있을 테니까.

 

 

슬아가 인터뷰를 마치면서 쓴 문장들을 복희가 읽는다. 한 고생이 끝나면 다음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 어떻게 자라야겠다고 다짐할 새도 없이 자라버리는 시간이었다. 고단한 생로병사 속에서 태어나고 만난 당신들. 내 엄마를 낳은 당신들. 해가 지면 저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계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당신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력이 그들에게서 엄마를 거쳐 나에게로 흘러왔다. 알 수 없는 이 흐름을 나는 그저 사랑의 무한반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이 나의 수호신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씨와 병찬씨를 통해 본다.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존자에 관한 여러 개의 진실이 시골집 거실에 차곡차곡 놓였다. 마당에서는 배추들이 절여지는 중이었다. 

 

 

복희는 딸의 책상에 기대어 감상에 잠긴다. 그리고 이렇게 혼잣말한다. "난 약간 그런 스타일인 것 같아. 외향적이면서도... 내향적인 스타일." 슬아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니컬하게 묻는다. "안 그런 사람도 있어?"슬아의 시니컬과 상관없이 복희는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한다.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면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그런 스타일 있잖아."슬아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복희를 평가한다."내 생각에 엄마는 약간 그런 스타일이야."복희가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어떤 스타일?"슬아가 대답한다. "좀 시끄러운 스타일." 복희가 인상을 쓰며 빵을 크게 베어 문다."잘났어."그는 툴툴대며 내려간다. 복희가 떠난 서재에서 슬아는 묵묵히 일을 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조금 못됐다고 생각한다.

 

 

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것에 실패했지. 부엌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언제나 실패했지. 복희가 차린 밥을 매일 대접받으면서도 그랬지. 슬아는 자신이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고 느낀다. 그러는 사이 복희는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는다. 소설은 복희의 눈코입을 통과하며 거의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다. 바로 이 사람을 독자로 만나기 위해 몇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듯이, 소설은 복희의 손 아래에서 영광을 누린다. 

해가 저문다. 슬아는 쓰던 글을 더디게 완성하고 송고한다. 같은 방 안에서 복희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복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완독한 소설이 된다. 책을 읽느라 오후를 다 쓰다니. 복희는 스스로가 놀랍다. 그리고 책이라는 것이 놀랍다. "책은 역시 멋진 거야." 그 사실을 오랫동안 까먹었던 사람처럼 복희가 중얼거린다. 

 

 

슬아가 복희를 껴안으며 웃는다. "우리 엄마 성 고정관념 붕괴되네~" 

복희가 미안한 얼굴로 외친다. "내가 너무... 고정됐었나봐!" 

여자들이 깔깔댄다. "다들 그래요~"

"맞아, 엄마. 나도 그래."복희는 젊은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헷갈려하며 웃고 있다. 슬아는 이 자리에 복희가 앉은 것이 좋다. "근데 흔들리니까 좋지, 엄마?" "응. 뭔가 막 배우는 기분." 막힘 없이 수정되는 복희를 보자 야무진 여자는 신이 난다. "우리끼리는 그런 농담도 해요. 각자 모부님한테 일단 자기가 남자 역할이라고 우긴 다음, 둘 다 집을 해오자고요. 엄마 아빠들은 아들한테만 집을 줄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복희가 책상을 치며 항변한다. "너무하다! 왜 아들한테만 집을 줘?"복희가 와인을 꿀꺽꿀꺽 들이켠 뒤에 제안한다. "여자 남자 역할 섞어버리면 되겠네. 헷갈리게~"우리가 하려는 게 그거라고 여자들이 대답한다. 바꿀 수 없는 일에 관해서 오래 생각하지 않는 복희도 이따금 생각한다. 그게 진짜로 못 바꿀 일인가? 손님이 올 때마다 복희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찰나 같은 과거와 도통 모르겠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웅이가 입을 연다. "남자를 만날 거면,"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그 한자가 여자애의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계집다움이기도 하다고 어린 슬아에게 말했었다. 슬아는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그러나 이제는 너무 나이들어버린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은 중요한 가치야. 나는 아름다운 것이 좋아. 그치만......" 아이는 슬아를 본다.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어.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명하게 될 거야." 

슬아와 아이는 글을 마저 읽는다.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슬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 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하품을 하며 슬아에게 질문한다. "선생님, 월화수목금토일은 왜 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슬아가 묻는다. 

"왜 월요일은 계속 돌아오는 거예요?"

슬아는 그런 질문을 처음 들어봤다. "그러게. 왜 월요일은 어김없이 계속 돌아올까... 나도 모르겠네."

 

늦은 오후. 책 배송을 마친 웅이가 집에 들어선다. 슬아는 아이들을 모두 보내놓고 마당에서 웅이와 맞담배를 피운다. 부엌을 치운 복희도 마당으로 내려온다. "무화과가 다 익었네. 우리 대표님은 글쓰느라 마당에 무슨 열매가 열렸는지도 모르시겠죠?"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 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줄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대가족의 고명딸로 태어난 저를 기지배라고 부르며 놀리던 남자들. 기지배라고 부르며 팔짱을 끼고 옷을 입히던 여자들. 자기 안의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기지배라는 말을 무색하게 해준 지혜로운 친구들. 그 모두를 복잡하게 사랑하며 이 책을 바칩니다. - 이슬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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