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2023. 11. 2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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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은 교묘하게 날 평가했다. 주로 좋은 말을 먼저 건네며 이전의 차림들을 깎아내리는 식이었는데, 당장 코앞에서 칭찬하는 이를 두고 화를 내기도 뭐 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전에 입었던 옷들을 다시 입어 보며 어느 부분이 어떻게 별로였는지, 나의 몸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했다. 그러다 보면 이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던 옷이 나의 단점만 부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옷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수납함에는 안 입는 옷들이 늘어났고, 새로 사는 옷들은 하나같이 정현이 칭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늘 목의 이물감에 시달렸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잊고 있다가 침을 삼킬 때면 한두 번씩 따끔 하는 정도였다.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 말하기조차 민망하지만 확실히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겐 느껴지는 것. 그런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가끔은 너무나 지루해서 차라리 이대로 흘러가 버렸으면 싶었다. 반짝이는 물결이 되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다면 이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은 몸에 힘을 빼고 고개를 쳐들었다. 산새 몇 마리가 무리 지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들이 부러웠고 그래서 얄미웠다. 어차피 그 둘은 한 끗 차이였다. 그리고 장난과 화풀이 역시 한 끗 차이였다. 

 

물은 더 이상 찾아오는 이들에게 장난을 치지 않았다. 한때 자신을 집어삼켰던 무시무시하고 시커먼 감정들은 진즉 강물과 시간에 희석되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그는 이전보다 더욱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을 감당해야 했다. 물의 공백을 메운 건 대부분이 생각들이었다.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우울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아주 나중에, 물고기들이 다 사라지고 하천이 말라붙은 후에도 계속될 삶을 상상하면 질긴 수초가 목을 조르는 듯한 갑갑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물은 생각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냥, 수표면에 동동 뜬 채 떨어지는 나뭇잎을 세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살았다. 

 

물은 애써 웅성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지금의 상태는 이상했다. 뭔가를 망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숲은 정말로 다시 왔다. 하루 종일 언제 숲이 올까 기다리던 물은 100번은 족히 연습한 대로 앙상한 손바닥을 가슴 쪽에 대고 쫙 펼친 채, 느리게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그에 숲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흔들었다. 

 

물은 어느 순간부터 하루 종일 숲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숲이 없는 시간에도 숲이 보고 싶었다. 발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늘 산책로에 귀를 기울였고, 수풀 스치는 소리가 나면 혹시 숲일까 싶어 누워 있다가도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함께 있다가도 숲이 이제 그만 가야 된다며 일어설 때면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하천에서 나갈 수 없는 몸뚱이도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숲은 늘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까." 물은 갈수록 숲이 궁금해졌다. 궁금함은 갈증 같아서, 물속에 있는데도 목이 말랐다. 녹조 낀 물을 마구 마셨지만 소용없었다. 물은 이 갈증이 숲과 함께하는 순간에만 가신다는 걸 알았다. 

물은 폭우를 기다렸다. 물귀신이 땅을 밟을 수 있을 때는 비가 와서 하천이 범람할 때뿐이었다. 온갖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그런 날. 그런 날에는 어차피 다들 뭔가 선을 넘으므로 물도 물에서 나갈 수가 있었다. 숲에게 가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했다. 하천이 범람할 정도로 많은 비가.

 

물은 자주 숲의 이름과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음 만남에는 좀 더 많은 말을, 오랫동안 나누고 싶었다. 숲이 매일같이 찾아 헤매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고, 언젠가는 자신에게 말해 주길 바랐다. 그날을 상상하자 계속되는 죽은 삶이 두렵지 않았다. 

 

이영은 잘린 소나무 기둥 위에 앉아 킬킬 웃었다. 물은 이영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의 걱정과 불안들은 깔끔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회색빛 세상이 환해졌고, 황량해진 숲과 물가에 일렁이는 담배꽁초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다. 물은 이영이 뒤돌아 숲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안녕이 아니라,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의미로. 

 

이영을 보고 싶었다. 쏟아지는 비와 흙과 돌 사이에서 물은 이영을 기다렸다. 이영은 분명 올 테니까. 빗줄기가 얼굴을 아프게 때려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물은 힘겹게 눈을 떴다. 탁하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흰 손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여울." 이영의 목소리. "널 만나러 왔어."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 세상이 암전되는 듯했다. 소음이 가시고 평온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제 하천도 없고, 숲도 없고, 마을도 없었다. 뒤집히고 뒤섞인 세상에서 여울과 이영은 서로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이 몸을 붙였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젖은 흙냄새에 파묻힌 채로 눈을 감았다. 

 

 


주연은 자신에게 가족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아빠를 사랑했나?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함부로 대하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이야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그가 꼴 보기 싫었던 적도 많았다. 사실 싫은 기억이 더 많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사랑하지만,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풀 때면 아빠와 마찬가지로 싫었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적당히 웃었고, 그들이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대학을 다녔다. 가끔은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주연은 그들이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조차 싫어졌다. 결국 그 모든 증오의 밑바닥에 깔린 건 애정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이럴까? 증오 없이 사랑만 하는 가족 따위는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건 다 가식이다. 적당한 가식이 세상을 유지시킨다는 걸 안다. 

 

자고 일어났을 땐,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는 또 말했다. "괜찮아, 주연아. 엄마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았다. 주연은 엄마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방역복을 입은 공무원들은 사흘 뒤에야 찾아왔다. 원래 뭐든지 공적인 것은 느리고 사적인 것은 빠르기 마련이다. 

 


그런 나날들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 행복한 날들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그러하듯이, 이미 시작된 비극이 그러하듯이 그런 날들은 계속되지 않는다. 그런 날들은 짧기에 달콤한 것이다. 비극은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고, 내가 해맑게 웃던 시점에 다시 우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절망에 몸부림쳤다.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한 적이 있던가. 내 모든 선택은 후회의 연속이었고 이번 역시 그랬다. 

 

"어떻게 되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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