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물질의 사랑

2023. 9. 25.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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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라현, 엄마 말 잘 들어. '원래 그런' 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하다거나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는 거 다 듣지 마. 그거 다 너희가 아직 어려서 상대방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알겠지? 

알겠어. 근데 엄마.

왜.

왜 남에게 상처 주려고 그런 말을 해?

사람들은 가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해. 그냥 상처 주고 싶어 해. 그러니까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지 네가 생각할 필요 없어. 

 

이상했지만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엄마는 그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고도 그날 양념치킨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하여튼 간에 엄마는 좀 이상했다. 엄마가 이상한 덕분에, 정말로 이상한 나도 덩달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언니는 어떤 말이든 회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으면 기운이 쫙 빠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언니를 사랑한 것은 그 모든 시간이 편안해서였다. 기운이 빠져서 그랬나. 어쨌든 언니는 꽉 막힌 중학교 생활의 유일한 휴식이자 숨통이었다. 또 언니는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는데 눈과 입이 길어 웃을 때면 둘 다 실선처럼 휘어졌다. 그게 너무 좋았다. 얼마나 좋은지 말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언니를 만나는 동안은 오롯이 행복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사랑을 속삭였던 민혁이와의 만남을 제외하고 그렇게 사랑이 행복으로만 설명 가능했던 것은 내 인생에서 언니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언니와 헤어지고, 엄마는 언제든 다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했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런 사랑은 살면서 딱 한 번만 온다. 아예 안 올 수도 있고. 그런 사랑을 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다. 

 

언니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처음에는 이별이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6개월이 지났을 때는 이별임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언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곱씹었고 그제야 민혁이와 언니가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라현아 그거 아니? 너는 가끔 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몸이 반짝거린다? 그게 무척 예뻐. 가만 보고 있으면 너는 진짜 빛나.

언니의 소식은 여전히 모르지만 나는 언니가 우울을 치료하고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해외로 나가든 학원을 차리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피아노를 치고 살았으면 했다. 언니의 행복을 바라는 것에 이유는 없다.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도 언니의 등을 쓸었던 것처럼, 사랑했기에 그것은 당연한 바람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타인이 말하는 '여자 같은'과 '남자 같은'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이 허울이라는 것을 나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어쩐지 남들보다 더 자유로운 존재라고 느껴지기도 했고, 때때로 남들보다 더 고통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내 몸의 난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은 무엇이라도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지금은 굳이 나를 무엇으로든 규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무엇도 되고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 

 

독립서점에서 중요한 건 커피보다 여기 진열된 책을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거든요. 손님이 물어보면 이건 어떤 책이라고 바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어야 해요. 제일 마음에 들었던 점이었다. 손님에게 말을 하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고로, 직원은 이곳에 들어오는 책들을 모두 읽어볼 수 있었다. 가게를 열고, 바닥을 쓸고, 어제 세척해놓은 기기들을 다시 맞추고, 첫 커피를 내린 후 휘낭시에 반죽을 틀에 넣고 굽는다. 판매되는 빵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보통 휘낭시에, 브라우니, 티라미수 정도였고 판매되는 순서에 규칙이 있다기보다 사장이 끌리는 대로였다. 어쨌든 나는 오픈 준비를 마친 후에 책을 골라 읽었다. 

 

그 책은 여행에세이였는데, 작가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지나친 사람들의 이야기, 다시 만날 수 없는 인연들에 대한 미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기억들의 나열. 내가 몇 편의 일화 중 가장 좋아하는 편은 쿠바에서 노래하는 소피아를 만난 이야기였다. 작가는 소피아를 사랑했다. 소피아도 작가를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읽기에는 타지에서 온 작가에 대한 친절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일화가 가장 기억에 남은 이유는 작가가 찍은 소피아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을 찍으면 이토록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구나. 나는 사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무튼 달랏다. 작가가 그때까지 찍은 사람들과 소피아는.

엄마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모두 읽었다. 감상을 참고할까 싶어 소감을 물었다. 엄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가 좀 말이 많고 감정에 질척거리네." 

"엄마가 감정이 메마른 건 아니고?"

"혹시나 하는 말인데 이런 감정은 배우지 마. 문장은 거창하고 아름답게 써놨지만 까놓고 보면 주변 탓하다가 그만 두는 사랑이잖니."

 

나는 아직까지 아빠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고, 현재 살아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엄마에게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 '알아서 뭐 하게?'였으므로 나는 언제나 내 상상으로 아빠를 살게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했다. 아빠 이야기가 나올 때 할 말이 없어 슬펐던 것도 중학교가 마지막이었다. 아빠가 한 명 있는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서 당연해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엄마의 말을, 그러니까 일일이 그걸 다 마음에 두고 있으면 정말로 필요한 감정이 들어올 곳이 없어 튕겨 나간다는 그 말을 다시 곱씹었다. 엄마는 잔여물 많은 감정을 되도록 빨리 떼어내려고 하는 걸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 슬프지도 않아." 

엄마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결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걸 잊으면 슬퍼지는 거야. 아마도 그 작가는 다시는 쿠바로 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겠지. 언제든 다시 쿠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은 문장은 쓰지 않았을 거야."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어떤 현상에 대처하는 방식이 엄마를 닮았다. '그럴 수도 있지'로 모든 걸 퉁 치면 삶이 한결 편안해졌다. 

 

"눈도, 코도, 귀도 다 다르잖아요. 손가락 크기도 다르고 머리카락이 나는 방향도, 심어진 눈썹의 개수도 다르잖아요. 지구 행성의 개체들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분류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보기에 지구에서 같은 생명체는 단 한 개체도 보지 못했는데. 물론 다른 행성의 개체들 중에서는 피부가 다른 색을 띠고 있거나 온도나 빛의 문제로 다른 특징이 두드러진 존재들이 있죠. 하지만 그것만이 차이는 아니잖아요."

" 지구의 주인들은 낯선 존재를 오래도록 상상해왔지만 받아들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죠. 이 드넓은 우주에 사는 생명체 중 지구만 그래요. 폐쇄적이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아주 특이한 성향이죠. 그러니까 당신도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돼요. 믿음에 무게를 부여하지 않아도 돼요. 답을 선택할 필요도 없고요." 

라오의 말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굳이 무언가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그래도 되고, 안 그래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으며 또 다르게는 무엇도 정답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럼 제가 외계인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지구의 절반은 외계인이에요. 모두가 다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웃긴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해요. 그걸 알아야 해요.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바람이 적당히 부는 초여름의 선선한 날씨였다. 서로를 외계인이라고 소개하기 딱 좋은 날씨이기도 했다. 라오는 내게 팔을 잠시 살펴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리낌 없이 팔을 내밀었다. 라오는 검지와 중지로 손목과 팔을 천천히 훑었다. 이 상황이 간지럽고 웃겼다. 로맨틱함이 말소된 공간에 정체불명의 두 외계인이 나란히 앉아 팔을 만지고 있다니. 웃음을 꾹 참으며, 나는 라오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 따위는 아니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런 감정은 학교에서 느껴본 적 없었으니, 사회의 감정이겠구나. 내가 노력해야지만 이어갈 수 있는 관계를 붙잡기 위한,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단어의 감정이려나. 

 

라오가 이 책에 대해 뭐라고 했더라. 문장이 선명했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돌연 어느 한 문장이 선명하게 빛났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어떤 사랑......."

나는 새벽 늦도록 창문 앞에 앉아 달 한 조각 덩그러니 떠 있는 밤하늘을 쳐다봤다. 누군가를 보기 위해 바다도, 하늘도 아니고 우주를 가로질러 올 수도 있구나.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나를 보기 위해 우주를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를 헤아렸다. 역시나 앉아서 기다리는 건 불가능이고, 결국 내가 찾으러 가야 할 운명인 걸까. 그렇다고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우주를 가로지를 수 있는 사랑에 대해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지구에서 사랑은 충분히 해봤으니 나도 이제 우주로 나갈 때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그곳에 앉아 했다. 

 

내 정체에 대해 고백하는 것이 분명 처음은 아니었는데, 나는 처음인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떨렸다. 모든 인간에게 배꼽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때와 같은 두근거림이었다. 고작 21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역사 속에, 내가 외면하고 덮어왔던 설움을 펼쳤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때 참았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덤덤했고, 또는 그 일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참아야 했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내 삶도 어쨌든 삶이라서, 기쁨과 슬픔이 공존했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고 상처와 포근함이 있었다. 내가 지나쳤던 모든 사람과 사랑이, 실은 지나친 게 아니라 그렇게 내 안에 굳어져 내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라오에게 말하며 깨달았다. 너무도 평화로운 오후였다. 

"세상에 '원래 그런' 건 없으니까요. 당연한 것도 없고. 라오 씨가 저한테 편견이 없다고 그랬죠? 맞아요, 저는 편견이 없어요. 늘 편견 밖에서 살아왔던 제가 편견을 가지면 그건 모순이죠. 아니면 나보다 더 큰 편견을 아직 제가 만나지 못했거나요. 어쨌든 저는 그래요." 

"언제나 밖에 있는 자들이 그 장벽을 없애네요. 라현 씨는 영원한 것들이 깨지고, 모든 것이 바뀐다면 어떨 것 같나요?"

"괴롭겠죠.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버텨왔듯이 또 버티겠죠."

 

차라리 단서를 모아 끈질긴 추리 끝에 찾아냈다면 이렇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라도 들지 않았을 텐데, 진실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유성우처럼 내리꽂혔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엄마를 보면서 한동안 숨 쉬는 것도 잊고 말았다. 진실이 관통한 후에 모든 조각은 차례차례 제자리를 찾아갔다. 엄마에게 알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엄마에게 이 지구를, '그럴 수도 있는' 행성으로 만든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까.

 

나는 지금껏 많은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왔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기를 빌면서. 내 감정을 당사자에게 흘려 선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감정을 쓸어 담으면서. 

 

나는 엄마가 홀로 삶을 살아가며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우주 어딘가에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 지구에는 엄마를 응원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내가 내 삶을 바쁘게 꿰어나가는 동안 엄마도 엄마의 삶을 차분히 꿰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억지로 하나를 맞췄다가 너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 그럴 바에야 그냥 너는 너 자체로 살아가는 게 더 맞겠다 싶었어. 배꼽이 없으면 어때. 틀린 것도 아닌데."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응, 그럴게."

"결국 너는 너야. 끝까지 무엇이라고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돼."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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