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

2023. 9. 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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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미약하게 빙하의 시린 냄새가 남아 있는 듯했다. 책을 끌어안고 자서 책에 남은 차가운 냉기가 천천히 심장을 얼어붙게 했으면 좋겠다고, 승혜는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후각은 촉감으로 전이되지 못했다. 대신 귓바퀴에 옮겨붙을 정도로 선명한 남극의 바람 소리가 들렸다.

 

특히 바다에는 아직도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가 수두룩했다. 바다가 결국 바이러스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지구의 모든 것이 바이러스의 숙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주가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바다를 헤엄치면서도 우주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의 생명체가 바이러스 숙주의 삶이 아닌 개인의 역사와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걸 온전히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걸 느끼게 해준 존재가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느꼈을 때 승혜는 다시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땅을 밟고 있는 것에도 멀미를 느꼈다. 적어도 지구는 승혜가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이 아니었다.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던 숙주가 사라졌으므로. 

 

"우주에는 어쩐 일로 왔어?" 

일을 묻는 거라면 승혜가 어떤 역할로 왔는지 주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연의 질문은 '왜 지구를 도망쳐 나왔는냐'라고 해석하는 게 옳았다. 

"지구가 너무 어지러워서."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직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를테면 네가 죽지 않고 끊임없이 해수면 밑으로 떨어지고 있을 거라는 예감. 그러다 돌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불가능의 확신. 우리의 이별이 지구에서만 일어난 일일 거라는, 스스로를 향한 같잖은 위안까지도. 

 

엄마, 엄마. 슬플 때는 기주처럼 해봐. 침대에 누워서 애벌레처럼 몸을 이렇게 말고 팔을 베는 거야. 그러면 몸이 동그랗게 말려서 편안해.

 

기주를 처음 만났을 때도 승혜는 저 아이가 자신의 삶에 커다랗게 자리 잡을 거라는 걸 짐작했다. 단순히 육체적 교집합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지리멸렬한 세상에서도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나아갈 조력자가 되리라는 것을. 너로 하여금 무기력하고 불분명했던 모든 것들에 의욕이 생기고 선명해지리라는 것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그런 일들처럼 알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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