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도둑 - 대체로 답장이 늦는 연인

2023. 9. 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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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없을 때 나는 봄을 가장 많이 생각했다. 

책에 써두었던 문장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같은 말을 다르게 썼다.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멀리 있어야 한다고.

부재는 존재를 증명하고 상실을 통해 사랑의 소유를 실감하게 한다. 

매일 여름인 곳에서는 진정한 여름을 느끼기 어렵다. 추위가 없다면 따뜻함도 느낄 수 없다. 이별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끝이 없다면 시작도 없다. 사라짐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거리가 없다면 가까워짐도 없다. 이 때문에 부재를 예측한 문장은 한층 더 입체적이다. 

빛과 소금의 노래 제목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가 내 마음처럼 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떠나가지 말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랑. 네가 없는 세상을 미리 그려보고, 그 세상의 허무함을 미리 깨달아 더 충실히 붙잡아 놓는 사랑.

부재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를 감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일에는 부재를 끌어안을 상상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부재를 사랑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랬겠지만, 어린 날의 연애에는 부재가 부재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건 젊은 사랑의 타당한 자랑거리였다. 부재, 존재 어쩌고 하는 말은 그저 어른들의 철학에 불과할 뿐, 어리고 열렬한 사랑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 애 얼굴이 일상의 순간에 겹쳐 보였던 스무 살의 나한테는 적용되지 않는 멋있는 헛소리. 그 애와 떨어져 있을 때 초조했다. 상대에게 언제나 내 앞에 존재할 것을 요구했다. 나의 시간을 잃을 테니 네 시간도 기꺼이 나를 위해 잃어줘. 그게 진짜 사랑 아니야? 강요는 나의 연애편지이자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이쿠의 한 구절처럼 "나만 바라보는 남자의 한심함을 알면서도 나는 자꾸 너한테 그것을 바랐다." 할 일 없는 학생들의 미련한 로맨스. 담백한 믿음을 연료로 작동되어야 탈이 없는 진정한 부재는 전혀 담백하지 못했던 내 마음 탓에 궁색하게 덜거덕거렸다. 혼자 있는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스물하나. 나는 그 애의 잦은 부재를 견디기 위해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그 도피가 나를 책으로 이끌었다. 여느 날처럼 도주하던 중 우연히 이 시를 만났다. 

 

당신의 부재가 나를 관통하였다.
마치 바늘을 통과하는 실처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실 색깔로 꿰매어진다. 
- 윌리엄 스탠리 머윈 <이별>

 

실 색깔로 꿰매어지는 그 휴전의 시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숙한 사랑의 연습, 혹은 단련, 혹은 시인이 쓴 것처럼 무력하지만 달콤한 바느질. 없음이 물어다 주는, 더 큰 있음의 기쁨을 알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그 시를 반복해 읽었다. 마침내 이별했을 때 나는 그 애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에서 기다리게 하는 사람으로. 이기적이지만 나는 그렇게 변했다. 기다리기만 했던 그 학생은 낯설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때 덜 중요한 사람이었나. 혹은 사랑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래서 사랑 밖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심심했었나. 나의 무료함을 사랑으로 가장해 너에게 매달렸었나. 뒤늦게 몇몇 이별에 나의 책임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인과 부재에 대한 오해를 쌓으며, 서운함을 주고받으며 생각했다. 친구 같은 사랑이 이 모든 사랑의 끝이기를 바란다고. 당연한 듯 서로를 원해도 그 사이 자리한 기다림이 비참해지지 않는 사랑.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 가사처럼 - Part-time lover, Full-time friend -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모양이다. 그 사랑이 뜨겁지 않다는 것은 흔한 오해일 것이다. 미지근해 보이는 그 사랑은 사실 낮은 온도로 가장 오래 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도 서로를 생각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각자의 고독을 이해하기에 연락이 뜸해도 불안해하지 않는 관계. 그 고독이 결국은 너를 위한 일이 되는. 함께 있을 때는 애인으로서의 부분이 전체가 되는.

아름다운 안심은 두 사람이 온전히 각자 존재할 때 태어났다. 연인이 있어도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랑. 때에 따라 친구였다가, 애인이었다가 하는 변형 가능한 유연한 사랑. 그 믿음은 활활 타지는 않았지만 결코 꺼지는 일이 없었다. 바람이 통하는 사이. 그 바람의 선선함은 영원을 뜻했다. 

 

서로 열심히 사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라짐을 이해하기로 했다. 대신 만나는 날에는 모든 것을 잊고 너랑만 같이 있는, 어설프게 연락을 이어가거나 만나서도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에게 존재를 나눠주는 짓은 하지 않는, 대신 매일 커가는 관계.

나는 그래야 마음이 깊어져도 나를 잃지 않을 것 같다고, 나를 잃지 않음으로써 너를 더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파렴치해 보일 수 있는 부재의 선포. 하지만 그것은 성실한 사랑의 선포이기도 했다. 

 

이제는 애달픈 마음에 앞서 지켜내야 할 내 시간, 내 일이 중요해졌다. 씁쓸한 고백이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만큼이나 나 자신과 보내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안다. 그 시간이 만들어낼 새로운 나만큼, 비슷한 종류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그 사람을 기대한다. 종종 일시적인 부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언제나 연락이 닿는 사람보다 끌린다. 그의 치열한 고독을 생각하면 기다림이 즐겁다. 

분리되지 않는 사랑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사랑이 다 만들어진 뒤에 그 세계 안에서, 뒤늦게 애달프던 마음을 허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정도의 무너짐은 이 사랑 안에서는 티도 안 날 거다. 앞면과 뒷면, 빛과 그림자, 침묵과 수다, 처음과 끝, 떨림과 권태, 납치와 방치, 벗음과 숨김, 키스와 서운함이 공존하는, 긴 나날들이 만든 촘촘함 속에 너도 나도 길을 잃어버리는, 우리로서만 걷는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발에 채이는 낙엽 같은 무언가.

서로의 부재를 꿰맨, 실 자국 무성한 사랑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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