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조각들

2023. 9. 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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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틀렸어!

근사한 곳에 따로 숨겨져 있을 것 같던 곳들이

너무 어이없게, 가깝게, 별거 아니게 있어.

진짜 허무하게 아름답다.

보란 듯이 가만히 있는 파리.

 

 

그곳에서는 삶을 사랑하기가 보다 쉬웠다. 거리마다 가득한 찬란함과 나의 날을 엮을 수 있었다. 떠돌며 사는 한 나의 반짝임은 안전했다.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행이라는 정체성이 빠진 내게 발생하는 모든 일을.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나를 나로 만드는 모든 지점을 그 과정에서 동경했던 것들이 보였다. 그리움이 두려워 꺼내 보지 않았던 기억들과 닮고 싶었던 사람들, 나의 지금에 기여한 지난 시간들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고 다가올 미래의 일부분이었다. 나는 그날들과 눈을 맞췄다.

 

 

이맘때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에 젖을 일도, 두꺼운 외투를 걸쳐야 할 일도 없다. 가을날에는 우아한 상쾌함만이 있다. 차분해진 날씨만큼 우리는 어떤 생각도 가공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볼 수 있다. 하지만 가을은 빨리 사라진다.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홀연함으로.

에스프레소처럼 꾹꾹 눌러 담아 내린 그때의 가을은 그 농도가 너무 진해서, 한참 동안 펼쳐보아도 부족함이 없다. 여전히 반갑도록 쓰고 떫다.

 

 

책 속의 주인공은 우울하다. 마음이 텅 비어 있다. 그는 다른 것을 원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의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미건조한 현재의 자신에게 싫증을 낸다. 마음을 움직일 사건 하나 없이, 일상은 같은 음과 박자만 반복한다.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따분함의 지속이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할 일은 상상이다. 그는 몽상으로 권태의 시간을 채운다. 혼자 방 안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빠져드는 상상이지만 그것의 성질은 결코 나른하지 않다. 그의 상상은 격렬하고 적극적이며, 가슴 저리도록 생생하다. 상상 속에선 다양한 존재들의 익살맞은 말썽이 계속되고, 그는 주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전사가 된다. 그러나 상상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다.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정말 눈부시게 빛난다.

무언가에 홀려 있는 상태가 되려면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단호함을 갖는 것.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은 깨끗해진다. 그 순간에 명확히 존재하게 된다. 눈을 질끈 감고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치열하고 얼얼하게, 그것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날들을 경험하다 보면 제각기 흩어져 힘이 없던 자아가 하나로 모여 보란 듯이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작은 몰입들이 쌓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차근차근 만나는 일이며, 찜찜함 없는 깊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나는 '무아지경'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정신이 한곳에 쏠려 자기 자신조차도 잊는다는 뜻이다. 호흡이 긴 호기심을 가지고 순간을 무한으로 늘리는 무아지경의 순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는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을 잠시 내려놓음으로써 느끼는 행복이다. 의식하지 않고 존재를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나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의식할 때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 지겨울 때 몰입한테로 갔다. 그러면 홀가분함이 마음 가득 채워졌다.

 

 

시간과 싸워 살아남은, 추억의 광채를 머금은 냄새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그 자리에 남아있다. 냄새 옆에서는 아무리 오래된 추억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내가 뱉은 빈말들은 스스로에게 허락한 작은 모욕이었다. 때때로 나는 상대방의 기분을 내 기분보다 먼저 생각했다. 평판이 두려워 거짓 배려를 일삼았다. 솔직함을 삼키고 불쑥불쑥 순수함을 잃었다.

우리는 거침없는 솔직함으로 가치 있고 꽉 찬 대화를 만든다. 좋은 대화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서로를 알아가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의견을 내보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태도는 곧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한다. 나는 다짐한다. 새로운 10년 동안에는 말 한마디, 한마디 진심으로 세상에 내놓자고. 그것이 날렵한 거짓말보다는 덜 사랑받아도, 굳이 내 진심이 아닌 말들로 나를 포장하려 애쓰지 말자고. 침묵이나 어색함을 깨기 위해 내 생각이 아닌 말을 내뱉지 말자고. 솔직함을 택하고 그냥 후련해지자고 다짐했다.

 

 

그 친구와 나만 아는 세계가 있었고 그 세계는 다채로운 비밀로 단단해졌다. "너만 알아야 해"라고 운을 띄우며 말하는 비밀은 우리의 사이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둘이 있을 때는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었다. 서로만의 비밀이 가득한 친구 사이는 책을 읽는 일과 유사하다. 독서는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일대일로 만나는 일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나에게만 슬쩍 자기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가 고심해서 만들어낸 세계 속을 유영한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 하나를 보장한다.

 

 

사랑하는 것에는 수많은 이유를 대기 좋지만 헤어지는 것은 뻔한 문제다. 마음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이별에 대한 변명의 전부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우리의 역사는 무척 짧았다. 완벽한 두 번의 데이트와 수많은 연락과 그의 바쁜 생활과 나의 긴 여행, 그게 변명의 전부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한 사이라서,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쉽사리 사랑에 빠졌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될 만한 행동들은 너무 부족했다. 우리는 몸을 맞대고 서로를 겪을 시간이 없었다. 제대로 다툴 줄도 몰랐고 제대로 실망할 줄도 몰랐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무례한 말을 건네 상처를 입히거나 윽박지르며 싸울 줄도 몰랐다. 해만 쨍쨍한 연애였다. 비나 바람, 눈, 소나기 그 밖의 모든 날씨가 없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눅눅한 기대만이 있는 연애였다.

내가 기대했던 날씨와 계절들은 기다림 속에 매몰되어 갔다. 구속도 없고 권태도 없는, 어떤 친밀감이 탄생시킬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런 사랑이 괜찮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아직 사랑이 아닌지도 몰랐다. 하루만 안 봐도 죽을 것 같은 연애, 서로의 일상을 침범해 서로만 아는 시간이 다른 모든 시간을 이기는 연애를 하고 싶었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속 캐리의 대사처럼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고, 소모적이더라도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내 일상에 침투해 바꿔둔 것이 적어, 그것을 정리하는 데에도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훌훌 털어내고 나니 새해였다. 이토록 깨끗한 이별이라니.

 

 

티내지 않은 멋을 쟁여두는 삶. 자신만 아는 모습까지 정돈된 삶. 그래서 외적인 꾸밈이 치장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증명되는 삶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내가 우러러보았던 그는 여전히 어여쁘다. 웬일인지 그와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아직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다. 곧 압구정동의 한적한 카페에서 그와의 약속을 잡아야겠다. 아마 그가 선물로 준 빈티지 가죽 재킷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탐냈었는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또래 같은 그와의 수다로 커피는 금방 동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두 번째 잔은 시켜 놓은 채 물을 것이다. 이 나이 때 꼭 해야 하는 일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없어서는 안 될 소지품은 무엇인지, 괜찮은 인연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니트는 어디 건지...

 

 

나는 춤을 추다가 마는 사람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눈치껏 금방 식히는 사람. 느낀다는 것은 바쁜 세상에서 사치다. 전율하는 일은 무모하고 유치하다. 느낌은 경험의 중요성에 밀려 아주 깊숙한 곳에 묻히고 만다. 표현하기 전에 나는 머리부터 굴린다. 기쁨에 혹은 슬픔에 무장 해제당한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면 약점이 잡히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다 보니 감동과 환희의 기준이 낮아졌다. 감탄보다 비판이 익숙해진 우리는 차갑고 똑똑해져만 갔다.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래서 삶이 늘어놓은 가치들은 축하받지 못하고 색이 바랬다. 검열을 한 번 거친 감정은 칭찬받을 만큼 멀끔했지만 천연의 색은 잃었다.

매 순간을 모조리 느껴 빨아들이는 그에게 세상은 무늬도 던져주고 색깔도 선물했다. 그의 삶은 거칠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하는 경험들을 제대로 씹고 삼키고 소화할 줄 알았다. 조르바는 매일같이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 대했다. 얼떨떨하고 순수한 처음의 순간이 그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무지무지 아름다운 초록빛 돌을 발견했음. 빨리 올 것. 조르바" 조르바가 보낸 전보는 그가 왜 아이같은 어른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한때 우리의 문장이기도 했다. 매 순간은 새것이라서 아이들은 사랑스럽게 재촉한다. 그들은 잘 느끼는 법을 알고 있다. 새로운 발견을 쌓아가며 아이들은 자란다. 자란다는 것은 아이였을 때 가졌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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